안성맞춤 (안성-맞춤, 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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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뜻

경기도 안성(安城)에 유기를 주문하여 만든 것과 같다는 데서, 조건이나 상황이 어떤 일에 딱 들어맞게 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 동안 빙과 장사를 한 덕분에 맛을 알게 된 와룡(臥龍) 소주는 이런 날의 기분과 그 해갈에는 더욱 ∼인 것이었다"

2. 생성시기

조선, 1608년 6월 18일(음력 5월 7일)

3.유래

임진왜란 뒤 유민이 증가하여 징수 대상 호구가 줄어들고, 또 전쟁 이전 약 163만 결이던 전답이 약 30만 결로 줄어들자 세수가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과세 기준은 호구 단위였기 때문에 땅이 많든 적든 관계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임진왜란이 끝난 뒤 양반 지주들은 토지를 숨기거나 축소 신고를 했다. 또한 수공업자들은 세금 대신 방납()이라고 하여 정해진 물품을 생산해 조정에 바쳤는데, 여기서 방납 중개인과 지방 관리들의 횡포로 정해진 수량의 몇 배를 무는 폐단이 잇따랐다. 이에 이이는 1569년(선조 2년)에 편찬한 그의 저서 『동호문답()』에서 대공수미법()을 주장했으나 실제 정책으로는 반영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국고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유성룡이 대공수미법을 실시했지만 금세 포기했다. 이후 한백겸과 이원익이 대공수미법을 개량한 대동법, 즉 전답의 양에 비례하여 쌀로 세금을 내고, 수공업자의 방납을 폐지하고 대신 필요한 만큼 조정에서 직접 사들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는 중에 선조가 3월 16일에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는 즉위한 지 며칠 뒤인 3월 29일에 대동법 주창론자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했고, 선혜지법()으로 불린 이 법을 시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1608년 6월 18일, 영의정 이원익은 조정에서 물가 조절과 기민 구제 업무를 맡고 있던 상평청을 확대 개편하여 선혜청을 창설하고 동시에 경기도 대동법을 관할할 지역청인 경기청을 두었고, 이원익이 선혜청과 경기청의 도제조를 맡으면서 이 법의 시행에 박차를 가했다. 다만 대동법의 과세 기준 변화가 혁명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에 양반 지주와 방납 중개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고려하여 전국 실시를 포기하고 경기도에 한해 시범 실시하게 되었다.

이 법이 실시되면서 경기도에 속했던 안성() 유기점들은 방납을 바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 대신 조정과 관아의 주문을 받아 제품을 제조, 판매하기 시작했다. 방납이 사라지면서 조정이나 관아에서 필요한 물품은 직접 구매를 했기 때문에 품질이 좋기만 하면 얼마든지 팔 수 있게 되어 안성은 일약 수공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맞춤형 안성 유기가 인기를 끌면서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겼고, 나아가 이 말은 만족스런 제품이란 뜻으로 발전했다.

4. 관련 홈페이지

  • www.anseong.go.k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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