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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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지식백과 - 동양극장 | 문화포털

동양극장[1]
개요

해방 전 대중 극단의 선두주자. 동양극장은 일본에서 전래된 신파극을 우리나라에 토착화했다. 1911년 임성구가 창단한 혁신단 이후 25년 뒤 신파극은 동양극장에서 일본색을 벗어버리고 우리 관객의 심리와 극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한국 대중 연극으로 자리하게 된다.

해설

동양극장은 배구자, 홍순언 부부에 의해 설립됐다. 배구자는 소녀 시절에 일본의 덴까즈 마술 단체에서 춤과 노래를 수업했다. 성년이 되면서 그녀는 대륙으로 진출할 꿈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묵었던 평양의 철도 호텔의 지배인 홍순언과 결혼에 이른다. 부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모토에서 배구자 무용단을 조직하는데, 1년에도 서너 번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린다. 요시모토에서 전속으로 있는 동안 흥행업에 눈을 뜨고 극장 경영에 뜻을 가지게 된 배구자, 홍순언 내외는 이 땅에 연극만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을 짓기로 결정한다. 서대문구 충정로 1가 62번지 소재, 501평의 대지를 매입한 그들은 시멘트 콘크리트의 2층에 왼쪽에는 모양으로 탑을 세운, 당시로서는 최신식 극장이던 일본 동경 다카라즈카 극장을 모방한 건물을 세운다. 동양극장은 대지 488평에 건평 373평(2층), 객석 684석에, 회전무대에 호리존트까지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유일한 연극 전용극장이었다. 1935년 11월 1일 배구자 악극단을 주축으로 영화, 무용 등 다양한 개관 프로그램으로 개관한 동양극장은 홍순언, 배구자 부부가 명목상의 사장으로 있기는 했지만, 실절적 경영은 당시 소설 작가이던 독견 최상덕이 지배인을 맡으면서 거의 전담했고, 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박진이 부책임자 격으로 활동했다. 동양극장은 흥행을 순조롭게 하고 관객들에게 신용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수의 작품을 필요로 했다. 하나의 레퍼토리로 보통 5일 정도 공연했으므로, 매달 여섯 개 이상의 각본과 개막과 폐막에 쓸 단막 각본이나 촌극 대본이 요구된 것이다. 동양극장은 자체 내 문예부를 두고 전속작가들을 계약했다. 박진을 부장으로 한 문예부에는 처음에 최독견, 이서구, 이운방, 송영, 임선규, 김건 등이 소속됐고, 후에 김영수, 박신민, 박영호, 김태진 등이 가세해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한 작가가 한 달에 평균 한 작품 이상을 썼는데, 그 중에서도 박진, 최독견, 이운방, 임선규, 이서구가 두드러지게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동양극장이 당대에 그토록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후에는 전문적인 여러 연출가들의 역량이 있었다. 특히 홍해성은 일본 축지에서 연극 수업을 한 배우 겸 연출가로 동양극장의 연출책임을 맡아 약 4백여 편의 작품을 무대화했다. 그 외에도 박진, 안종화, 한노단, 이서향 등이 주로 연출을 담당했고, <신사임당>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던 안영일과 송영 작 <산풍>으로 연극 경연대회에서 연출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나옹은 객원 연출로 활약했다. 연극 상설을 표방하고 나선 동양극장은 극장 내 전속극단을 두었다. 전속극단 제1호가 청춘좌로 신극은 못 될망정 신파로서는 좀 참신하고 매력적인 것을 꾸며볼 목적으로 젊은 세대들을 모았다. 박제행, 서월영, 심영, 황철, 차홍녀, 지경순, 김선영, 한은진, 유계선 등이 주요 멤버로 모두 20여 명 정도였다. 신극사상 최초의 본격적 직업극단 청춘좌는 1935년 12월 15일부터 최독견 작 <승방비곡>, 이운방 작 <국경의 밤> 등을 공연한 후 5, 6일에 한 번씩 레퍼토리를 바꿔가며 연중무휴 공연행진을 해 나갔다. 청춘좌가 공연을 시작한 후 동양극장은 사극 전담의 제2전속극단 동극좌, 희극 전담의 제3전속 극단 희극좌를 만들었다. 그러나 동극좌와 희극좌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해 둘의 멤버들을 합쳐 호화선이란 새로운 전속 극단으로 바뀌게 된다. 장진, 서일성, 박창환, 박고송 등이 창단 멤버인 호화선은 처음에는 레뷰(revue) 형식의 연극으로 출발했으나, 결국에는 일반 연극으로 나아가 청춘좌와 비슷한 성격이 됐다. 호화선은 청춘좌보다는 연기나 인기 면에서 뒤졌으므로 청춘좌보다 지방 공연을 많이 했다. 동양극장의 주연급 인기배우로는 청춘좌에서 서월영, 박제행, 심영, 황철, 변기종, 한일송, 김선초, 김선영, 남궁선, 차홍녀, 지경순, 한은진 등이 있고 호화선에서는 서일성, 장진, 전경희, 맹만식, 양백명, 박영신, 유계선, 최승희, 문정복, 이정순, 이백희 등이 있다. 당대 최고의 명배우들로 구성된 청춘좌와 호화선이란 두 개의 전속극단을 거느린 동양극장은 두 극단이 쉼 없이 교대로 지방 공연을 계속하며 동양극장 내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에 연극을 대중화시켰다. 동양극장의 레퍼토리는 저녁 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 볼 수 있는 4~5막짜리의 장막극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연극 공연에서는 막간극이 삽입되거나 버라이어티쇼가 뒤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쇼는 연극의 해독이다’란 입장을 견지한 동양극장은 막간극을 없앴다. 처음에는 정극 외에 희극도 함께 공연했으나 관객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없어졌다. 관객들은 식민지적 현실 안에서 희극보다는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멜로드라마를 보다 즐겼다. 동양극장의 대표작들로는 <검사

와 사형수>(이운방 작, 청춘좌, 1935년 12월), <단종애사>(청춘좌, 1936년 7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임선규 작, 청춘좌, 1936년 7월), <수풍령>(임선규 작, 청춘좌, 1936년 10월), <유정무정>(임선규 작, 청춘좌, 1936년 12월), <여인애사>(최독견, 청춘좌, 1937년 8월), <유랑삼천리>(임선규 작, 호화선, 1938년 10월), <사비수와 낙화암>(이운방 작, 청춘좌, 1939년 1월), <정열의 대지>(임선규 작, 청춘좌·호화선 합동공연, 1939년 11월), <북두칠성>(이운방 작, 호화선, 1939년 6월), <무정>(호화선, 1939년 11월), <나는 고아요>(이운방 작, 호화선, 1940년 3월), <대지의 어머니>(박신민 작, 청춘좌, 1940년 6월), <신사임당>(송영 작, 청춘좌, 1945년 1월) 이 있다. 당시 관객 취향에 맞춰 눈물이 범람하는 멜로드라마가 대부분인 동양극장의 극본은 1910년대 후 우리나라에 유입된 신파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을 받아왔지만, 동양극장 배우들의 연기 자체는 ‘리얼한 연극’을 추구한 점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일본에서 전문적 연극 수업을 했고, 다년간 연출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인 동양극장 연출가들은 과장된 화법과 액션으로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이는 신파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연스러운 대사 발성과 리얼한 연기를 배우들에게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한국 연극사상 최대의 연극 전성기를 누린 동양극장은 홍순언의 죽음 후 지배인 최독견에게 경영권이 넘어가게 된다. 최독견은 방만한 운영으로 결국 1939년에 부도를 낸다. 극장 경영주의 교체는 전속 단체의 분열로 이어져 황철, 차홍녀 등의 배우들이 청춘좌에서 이탈해 새로운 극단을 만든다. 그 후에도 일관되게 10여 년간 연중 무휴 공연을 유지하며 해방을 맞이한 동양극장은 전속 단체의 해산에 이어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 2월 27일 철거됐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어려서 부모를 일찍 여의고 가난한 살림에 오빠 철수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는 오빠의 친구인 부잣집 아들 광호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둘은 집안의 반대와 동경유학을 한 신여성인 광호의 약혼녀 혜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광호는 홍도와 함께 북경으로 유학을 떠나려 하지만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홍도만을 남겨둔 채 혼자서 떠나게 된다. 유학간 광호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보내지만 시어머니와 시누이 봉옥, 옛 약혼녀 혜숙, 하인 월초의 방해로 매번 받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끝내 작당을 하여 홍도를 함정에 빠뜨려 시집에서 쫓아버린다. 1년 후, 홍도는 유학갔던 남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시댁을 찾았으나 홍도는 남편에게마저 버림을 받는다. 억울한 누명에 제정신을 잃은 홍도는 과도로 혜숙을 찌르고 운명의 장난처럼 순사가 된 오빠에게 잡혀가게 된다. < 속편> 원작에 약 30분 분량이 덧붙여진 속편에서는 홍도가 살인미수로 법정에 서게 되고 오빠 철수는 변호사로 나서게 된다. 오빠의 변론으로 법정의 재판관, 방청객들이 눈물바다를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무죄 선고를 받은 홍도가 오빠와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 막이 내린다. (……)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양극장 최고의 인기 레퍼토리이자 해방 전 연극사상 최다 관객을 동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원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으나 동양극장 사장이던 홍순언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에 최독견이 ‘그거 기생 이야기 아니오, 기생이란 건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게지 뭐.’라고 한 말이 그대로 제목이 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제목은 지방 유랑극단들이 변조해서 사용하던 명칭이다. 처음에 임선규가 이 작품을 써왔을 때 박진 선생이 먼저 작품검토를 하고, 내용이 저속하니 상연할 수 없다 하여 원고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두었다. 갑작스레 터진 일에 당황해하던 홍순언은 자기 생각엔 괜찮은 작품 같으니 공연을 해 보자며 다른 사람의 반대를 우격다짐으로 묵살했다고 한다. 공연을 해 보니 첫날엔 관객이 없었는데, 재일(둘째날)부터 극장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었다. 홍순언의 흥행사적 기질이 빛난 것은 이 다음이다. 연일 관객이 장사진을 치고 표를 못 구해 아우성이었는데도 일주일 만에 극장사정이라며 공연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임선규에게 두둑이 작품료를 지불하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속편의 집필을 부탁하여 석 달 뒤 부민관에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전, 후편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 광화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질서유지를 위한 기마 경찰대가 파견될 정도였다. 동양극장은 700석 규모였고 부민관은 1200석 규모였으니 재주를 부린 것이다. (……) - <이야기 근대연극사>, 고설봉

승방비곡

영일과 은숙은 운명의 장난으로 이복남매인 줄 모르고 애틋한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끝내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이들은 비련을 청산하게 되고, 이들 친구들의 평범한 애정이 결실을 맺게 된다. <승방비곡>은 1927년 5월 10일부터 9월 1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희곡으로 각색되어 동양극장 청춘좌에 의해 창립공연으로 상연되기에 앞서 1930년 이구영 각색·감독으로 동양영화사에서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검사와 사형수

2막의 사회극으로 등장인물은 7~8인 정도로 상연 시간은 2시간 남짓 된다. 한 청년이 연애 문제로 시비가 붙은 끝에 깡패에게 쫓겨 도망친다. 힘으로는 도저히 맞겨룰 수가 없는데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자 청년은 돌을 들어 깡패에게 던진다. 위협을 목적으로 던진 돌이었으나 깡패는 머리에 돌을 얻어맞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청년은 졸지에 살인자가 되어 법정에 서는데, 청년을 기소하는 검사가 청년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취조를 하고 현장 검증도 하고, 법정에서 논고를 통해 ‘너와 나는 사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지만 여기서는 검사와 사람을 죽인 죄수로 만났다. 무고한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이다’라고 사형을 구형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의 선고를 들은 아들이 증거물로 제시된 돌을 붙들고 불가항력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흐느낀다. - <이야기 근대연극사>, 고설봉

단종애사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 그의 숙부 수양대군에게 쫓기어 강원도 영월까지 귀양갔다가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사실을 충실하게 서술한 작품이다. (……) <단종애사>는 동양극장 최초의 장막극 공연으로서 당시 연극계의 고질적 병폐였던 악극단식 쇼를 연극무대에서 근절하고 연극만으로 관객과 만난 공연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 <단종애사>는 청춘좌·호화선의 합동공연으로 공연시간이 세 시간 내지 네 시간에 달했고 스펙타클한 장면이 많았던 전 15막의 대형 연극이었다. 궁중생활의 묘사와 무대의상으로 제작한 궁중의상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단종이 살해되는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하여 수양대군의 행위를 재평가한 의의가 있다. 단종 역에 아역을 하던 윤재동이 기용되어 대인기를 끌었는데, 이 작품 이후 윤재동은 고향인 개성으로 낙향하였다. <단종애사>가 고별무대가 된 셈이다. 그러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단종애사>는 이왕직(李王職)의 항의를 경찰에서 받아들여 갑작스레 공연중지 판정을 받는다.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들이 단종을 헝겊으로 목 졸라 죽이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것이 왕가를 모독했다 하여 이왕직에서 항의를 한 것이다. (……) - <이야기 근대연극사>, 고설봉

어머니의 힘

1930년대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와 함께 신파극을 대표하는 한 작품으로 대중적인 오락성을 드러내고 있어 동양극장의 인기 레퍼토리 중의 하나였다. 5막 5장의 장편 희곡으로 호화선에 의해 초연된 후 동양극장의 단골 레퍼토리로 정착되어 청춘좌와 함께 상연하였다. 은행가 이은식의 아들 명규는 화가로서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생 출신의 윤정옥과 결혼하여 집을 나와 어려운 신접 살림을 차린다. 그림을 팔아 겨우 연명하는 형편인데 명규는 폐병에 시달리게 되고, 아버지는 아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부자의 연을 끊어 버린다. 결혼한 딸을 색주가에 팔아 넘기려는 정옥의 모친, 은식의 재산 상속을 노리는 사촌형 홍규, 기생시절에 정옥의 기둥서방 노릇을 했으나 나중에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옥주사 등이 음모에 가담한다. 결국 명규는 병으로 죽고 정옥은 아들 영구를 낳는데 은식은 영구만을 데려다 키운다. 그러나 엄마를 못잊는 영구와 정옥의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침내 은식은 정옥을 며느리로 맞아 들인다.

이운방

본명은 운영이고 호는 백연이다. 1925년 토월회에 신인배우로 입단 후 작품에 출연하면서 작품창작도 하였다. 1929년 <초생달>을 시작으로 <즐거운 인생>, <목신의 장난> 등 1931년 토월회가 폐단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1935년 동양극장 개관과 함께 전속 극작가로 입단하여 극단 청춘좌와 호화선의 작품을 집필하였으며, 1940년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되기 바로 전에 극작가동호회를 결성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 대표작품 <검사와 사형수> <조선의 어머니> <어부의 집> <국경의 밤> <장한몽>

박진 (1905~1974)

서울 출생의 극작가이며 연출가. 일본대학 예술과 중퇴 이후 연극에 투신, 토월회에 가입했으며 간부로서 연출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어 산유화회, 화조회를 조직했으며(1928), 동양극장에서 안종화, 홍해성 등과 더불어 연출가로서 활동했다. 광복 후 문교부 주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서 <혈맥>(1946)을 연출하여 연출상을 수상하였다. 국립극단 단장(1959), 예술원 회원(1960), 한국연극협회 이사장(1962), 국립극장 운영위원장(1973) 등을 역임하였다. 연출작품으론 <향토심>(1927) <화란을 당한 자>(1928), <꽃피는 나무>(1943) 등 수백편에 달한다. 극작가로서는 장막극 <소낙비>(1927)가 데뷔작으로 <명기 황진이>(1936), <공작선생>(1951) 등이 있다. · 대표작품 <검사와 사형수> <혈맥> <야화>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최독견 (1901~1970)

황해도 신천 출생의 연극인, 소설가, 언론인. 본명은 상덕(象德), 필명은 독고독(獨孤獨)이다. 1921년 중국 상해의 혜령 전문학원 중문과를 졸업하고 바로 ‘상해일일신문’ 기자를 거쳐,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중외일보’ 학예부장을 지냈고, 연극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29년 11월 토월회가 박승희의 <아리랑 고개>를 재기공연으로 상연할 당시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이어 동양극장 지배인(1932), 동양극장 사장 서리(1938)가 되어 운영 및 극작에 힘썼다. 그 후 연극협회 이사(1940), ‘평화신문’ 부사장, ‘서울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대표적 소설로는 <승방비곡>(1927), <자색봉투>(1928), <낭만시대>(1964)를 들 수 있으며, 주요 희곡으로는 동양극장 개관공연 악극 <피리의 기적>, <쌍동의 결혼>(1932)을 비롯하여 <승방비곡>(1935), <춘향전>(1936), <사의 찬미> 등이 있다.

홍해성 (1893~1957)

대구 출생의 근대극 연출의 선구자다. 1920년 김우진 등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극예술협회의 회원이 되면서 근대극 운동에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연극 공부를 위해 일본대학 예술과에 편입학하여 졸업했다. 이후 본격적인 연극 수업을 쌓기 위해 당시 일본 근대극 최고 극장이자 극단인 축지소극장에 가입하여 5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무대 앞뒤의 풍부한 체험과 지식을 쌓았다. 1930년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의 초기 작품인 <검찰관>, <관대한 애인>, <토막>, <인형의 집> 등을 연출하였고, <벚꽃동산> 등의 학교극도 연출하였다. 그 후 1936년부터 동양극장이 창설된 후 연출책임자로 초청되어 1941년까지 <승방비곡>, <유랑삼천리>, <검사와 사형수>, <단종애사>, <어머니의 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 수많은 작품을 연출하여 성공시킨다. 광복 후에는 신극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서라벌예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 대표작품 <검찰관> <관대한 애인> <토막> <인형의 집> <앵화원> <승방비곡> <유랑삼천리> <검사와 사형수> <단종애사> <어머니의 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여인애사> <김옥균>

이서구 (1899~1981)

1899년 경기도 안양 출생. 호는 고범으로 일본대학 예술대학을 중퇴하고 동아일보 기자와 조선일보 동경특파원으로 활동을 했으며 김기진, 김복진, 박승목, 김을한, 이제창 등과 함께 신극 연구단체 토월회를 창단하였다. 1947년 10월 유치진과 함께 전국연극예술협회를 결성하였다. 태평레코드회사 문예부장, 경성중앙방송국 연예주임, 한국무대예술원 2대 원장, 대한연극협회장, 한국방송극작가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단막 희극 <동백꽃> 이후 동양극장에서 계속 50여 편의 사극을 집필 발표했다. 저서로는 <풍류의 뒷골목>, <세시기> 등이 있다. · 대표작품 <서광 삼천리> <무화과> <어머님 사랑> <아들의 심판> <사랑을 팔아 사랑을 산 여자>

리뷰

<어머니의 힘>에 관한 리뷰 (……) 사랑과 정열의 교류를 기록한 산문시로 순정을 바치고도 단란한 가정생활을 못하는 숙명적인 여성의 고민을 그렸다. 그러나 이 한편의 명극에는 단단한 인생의 파도를 휘저어 나가는 굳은 신념이 있고 새로운 서광이 있다. (……) - <매일신보>, 1941년 2월 24일 (……) 한동안 만주국 봉천 등지로 극단 호화선과 함께 순연을 하면서 절찬의 호평을 받은 청춘좌는 금반 이서구 작 <어머니의 힘>을 가지고 동양극장에서 상연 중이라는 바 그 극적 사건이 현실의 고민상을 배경으로 한 숙명적인 여성의 모성애를 표현한 것으로서 천재 유년명화 조미령과 어미니 역을 분한 청춘좌의 히로인 진량양의 연기는 매력을 끌어 연일 대성황 중에 있다. (……) - <매일신보>, 1941년 3월 3일

관련도서

<동양극장의 연극인들>, 김영무, 동문선, 1998<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한국 근대극의 재조명>, 김미도, 현대미학사, 1995 ‘동양극장과 임선규’, 김미도, <우리극 연구 6>, 공간미디어, 1995

연계정보
  • 승방비곡
  • 단종애사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어머니의 힘
  • 검사와 사형수
  • 피리의 기적
  • 석공조합대표
  • 박진(朴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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