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예술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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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지식백과 - 극예술연구회 | 문화포털

극예술연구회[1]
개요

1931년 일본에 유학한 해외문학파를 중심으로 발족한 극예술연구회는 서구 연극의 이론을 통해 당시 흥행극 위주의 우리나라 연극 현실에 새로운 순수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연극운동적 성격을 지향했으며, 서구 리얼리즘극과 창작극을 공연한 대표적인 신극 단체였다.

해설

극예술연구회(약칭 극연)는 설립목적을 ‘극에 대한 일반의 이해와 우리 신극 수립을 위하야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극단의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을 수립’(<조선일보>, 1931년 7월 19일)하는 것이라 밝혔다. 연극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회에 본격적인 신극의 공연을 통해 민중들을 계몽하겠다는 뜻, 당시의 흥행극으로 인한 상업주의적 연극 형태를 바로잡겠다는 뜻, 그리고 본격적 리얼리즘 극을 정착시키겠다는 뜻이다. 극연의 창립 멤버는 윤백남, 홍해성, 서항석, 이헌구, 조희순, 이하윤, 함대훈, 장기제, 최정우, 정인섭, 유치진 등 12명이 있다. 극연의 공연 활동은 크게 3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홍해성이 연출을 담당한 1932년 5월부터 1934년 12월까지이고, 제2기는 홍해성이 동양극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주로 유치진이 연출을 담당한 1935년 11월부터 1938년 2월까지 그리고 제3기는 극연좌로 이름을 바꿔 활동한 1938년 5월부터 1939년 5월 해산되기까지이다. 이 기간 동안 극연은 모두 24회의 정기공연을 가지는데, 그 중 창작극이 12편이고, 번역극이 24편이다. 창작극으로는 유치진의 작품이 6편, 이무영이 2편, 그리고 이광래, 이서향, 김진수, 함세덕의 작품이 각 1편씩이다. 번역극에서는 러시아 작품이 5편, 영국과 독일, 미국이 각 4편, 프랑스 3편 그 외에 아일랜드, 이태리, 덴마크, 중국의 작품이 각 1편씩이다. 초기에는 서구 번역극 위주로 공연을 하다가 유치진이 연출을 맡으면서부터는 리얼리즘 창작극 위주로 공연을 가졌다. 또 극장도 소극장에서 대극장인 부민관으로 옮겨 대중적 기반 확보를 노리기도 했다. 극단은 이처럼 신극의 뿌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 연구적이고 실험적인 소극장 운동을 통한 리얼리즘 극의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38년에는 연구극단을 사상 단체라고 문제삼은 일제에 의해 직업극단인 극연좌로 개편하였고, 대중에게 영합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극연의 연극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신극 운동의 입장에서 192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소인극 활동을 통한 대중의 계몽과 사실주의 연극 운동의 맥을 계승했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사실주의 연극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이다. 극연의 활동 중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극예술>이라는 연극전문지의 발간이다. 1934년 4월에 창간된 이 잡지는 1936년 9월까지 5권이 발간되었는데, 연극이론 및 해외연극에 대한 전문적인 소개와 당대 연극상황에 대한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다.

출처 : <한국 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학교출판사

촌선생

<촌선생>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그 해 4월 극연 제10회 작품으로 새로 개관한 부민관에서 관객 5,0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연되었다. 아버지 송선생(촌선생으로 불리운다)과 아들 형제(달훈, 달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농촌극이다. 부자간 갈등을 통해 당시 농촌 현실 문제를 폭넓게 제시하려 했다. 등장 인물의 성격 설정이 분명하고,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서정적이고 극적인 분위기 조성과 상황 처리가 잘 이루어져 있는 점에서는 세련미를 보인다.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주인공 송선생은 20년 전 도시에서 귀향한 인물로 고향의 발전을 위해 사재를 털어 야학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서울에서 소학교 선생을 하던 장남 달훈과 유치원 보모 출신의 아내 성희가 귀향하는데 그들은 농촌생활에 대해 다분히 환상과 허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온 농촌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여 농사꾼들은 하나 둘 농토를 버리고 북간도로, 일본으로 떠나가는 참이다. 농촌을 떠나가는 농민들과 함께 빚 때문에 팔려가는 처녀들, 도시를 동경하여 떠나가는 처녀들도 수두룩하다. 그녀들에겐 도시에서 온 성희나 진흥농장 서기인 영석의 첩 숙정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성희와 숙정은 서울 출신이라는 이유로 단짝이 되어 시골 사람들을 괄시하고 무시한다. 시골로 내려와 ‘대지주의 퀸’이 되려했던 성희는 금세 시골 생활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달훈 부부에 비해 차남 달근과 약혼녀 옥정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지극한 커플이다. 그러나 달근은 형의 혼사 빚 때문에 입도차압을 당하게 되고 야학교까지 처분해야 할 형편에 놓이자 소를 팔아 대판으로 떠나고자 한다. 송선생은 결국 달훈 내외를 서울로 돌려보내고 달근, 옥정과 함께 끝까지 고향을 지키기로 한다. (……) 금번 조선의 진실한 극문화 수립을 목표로 하고 5년의 시일을 두고 꾸준한 노력으로서 문자 그대로 형로와 암초우를 용감히 고군분투하여 걸어나오는 극예술연구회가 그 제10회 공연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리들 조선의 극작가들로서 빚어진 순창작극만을 상연한 것은 가장 의의잇고 정당하다고 확신함을 주저히 안흐며 나아가서 필자로서는 조선의 진실한 극문화 향상을 위하여 최대의 찬사를 애끼지 안는 바이다. 하믈며 금번 약 2천명이 수용된다는 부민관에 연 3회 계속적으로 대만원을 일우웠다는 큰 성과를 얻엇음에랴! (……) 이광래작 <촌선생>(전3막)은 자기 향토를 지키자는 주제로 조선농촌의 복잡한 실정미를 단편적으로나마 다분히 가지고 잇어 관객으로 하여금 만흔 호의를 가지게 하는 조선극작계로서는 가작의 부류에 들 작품이라고는 하겟으나 주제와 제재가 상합하지 못한 점이 이 희곡의 치명상이다. (……) 그러나 이 희곡 자체의 모순과 부득이 삭제를 당한 개소가 잇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대호평을 받은데 대하여는 이 희곡의 제재인 농촌사정이 무내용하나마 조선의 현대 뿌루·인테리층의 자부심과 유한심리와 영합한 관계도 있겠지만 연출자 유치진씨의 공적도 컷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극연 제10회 공연을 보고(上,中,下)’, 이운곡, <동아일보>, 1936년 4월 14일~16일

토막

<토막>은 동랑 유치진이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월에 걸쳐 ‘문예월간’에 발표한 작품으로, 1933년 2월 극연에서 공연되면서 그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 되었다. 당시의 비참한 현실을 객관적이며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관객들의 많은 동감을 불러일으켰으며 한국희곡사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경선네는 소작농으로 근근히 지내다가 땅마저 빼앗기고 장리쌀 몇 가마 얻어 먹은 것을 갚지 못해 토막마저 빼앗긴다. 명서네 또한 경선네보다 나을 것이 없다. 일본으로 돈벌이 간 명수를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던 중 구장이 명수가 해방운동을 하다가 종신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기사와 함께 명수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들고 찾아와서는 명수가 하는 해방운동이란 것이 훔치기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명수의 여동생 금녀는 처음에는 구장의 말만을 믿고 오빠가 한 일을 나쁜 짓으로만 알고 있다가 점차 그 일이 우리 민족을 일제의 억압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집을 빼앗겨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떠돌이 등짐장수를 하던 경선이는 돌아와 처자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한다. 어느날 명서의 집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동네 청년 삼조가 보낸 명수의 백골 상자가 돌아오자 어머니는 끝내 미쳐버리고 비극은 절정에 달한다.

유치진 (1905~1974)

경남 통영 출생의 극작가이며 연출가, 연극평론가이다. 호는 동랑(東朗).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도일,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서항석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신극 운동을 주도한다. 1931년 희곡 <토막>을 ‘문예월간’지에 발표하고, 계속해서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1933), 장막희곡 <소>(1935)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사회성을 배제한 낭만적인 작품들인 <자매>(1936), <마의태자>(1937), <부부>(1940) 등을 발표하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국민연극운동을 벌여 자신이 친일작품으로 인정하는 <흑룡강>(1941), 친일의 선봉 이용구를 찬양한 <북진대>(1942) 등의 희곡을 쓰고 공연하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자명고>(1947), <원술랑>(1950) 등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역사극과, 반공을 주제로 한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 등의 역작을 발표하였다. 이후 극작과 연출, 평론 활동을 계속한다. 초대 국립극장장, 반공통일연맹 이사, 동국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65년에는 드라마센터를 창립하여 사실극 성립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서울시문화상·예술원상(1955), 문화훈장 대통령장 서훈(1962), 문화공보부 3·1연극상(1967), 문공부장관 공로장(1970) 등을 수상하였다. · 대표작품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 <소> <원술랑> <마의태자> <나도 인간이 되련다> <춘향전> <왜 싸워> <한강은 흐른다> <촌선생> <도념>

이광래 (1908~1968)

경남 마산 출생의 극작가이며 연출가이다. 본명은 흥근이다. 배재고보를 졸업(1928)하고 일본 동경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영문학부를 중퇴하였다. 귀국 후 조선일보, 중앙일보에 근무하면서 극예술연구회 극작 연출부에 참여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촌선생>이 당선되면서 극작가로 데뷔하였으며 같은 해 ‘중앙무대’를 조직하여 연출가로도 활동하였다. 1945년에는 극단 ‘민예’를 조직하였고,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 예술국장, 한국연극학회 간사장, 신극협의회 간사장, 극단 신협 대표, 극단 극협 대표, 한국문학가협회 희곡분과위원회 위원장, 한국연극연구소 상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서라벌예대 연극영화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다. 1963년 대한민국문화포장, 1965년 5월문예상, 196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69년 삼일연극상 등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대수양>(1959), <고도있는 인간광장>(1962) 등이 있다.

홍해성 (1893~1957)

대구 출생의 근대극 연출의 선구자다. 1920년 김우진 등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극예술협회의 회원이 되면서 근대극 운동에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연극 공부를 위해 일본대학 예술과에 편입학하여 졸업했다. 이후 본격적인 연극 수업을 쌓기 위해 당시 일본 근대극 최고 극장이자 극단인 축지소극장에 가입하여 5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무대 앞뒤의 풍부한 체험과 지식을 쌓았다. 1930년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의 초기 작품인 <검찰관>, <관대한 애인>, <토막>, <인형의 집> 등을 연출하였고, <벚꽃동산> 등의 학교극도 연출하였다. 그 후 1936년부터 동양극장이 창설된 후 연출책임자로 초청되어 1941년까지 <승방비곡>, <유랑삼천리>, <검사와 사형수>, <단종애사>, <어머니의 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 수많은 작품을 연출하여 성공시킨다. 광복 후에는 신극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서라벌예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작품 <검찰관> <관대한 애인> <토막> <인형의집> <앵화원> <승방비곡> <유랑삼천리> <검사와 사형수> <단종애사> <어머니의 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여인애사> <김옥균>

유치진의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에 관한 평들 (……) 전막에도 말한 바와 같이 제재도 조왓거니와 사건의 태도도 매우 자연스럽다. 그 중에도 막이 열린 뒤에 할머니와 학삼의 대화라든가 계순의 옷을 사가지고 들어왔슬 때 비명에 죽은 아들의 옷가지를 세이든 것을 연상하는 할머니의 독백이라든지 술이 취한 성칠이가 등장한 뒤부터는 수십 분간 흠 잡을 곳이 없다. (……) - <조선중앙일보>, 1933년 12월 5일 (……) <토막> 상연으로 벌써 극작가의 높은 수준에 위했고, 외국극의 수준에 손색이 없이 세련되어 있다. 일종의 농토극으로 서정성이 농후하다. 밭두렁에서 잠잔 듯한 농촌의 단순하고 소박한 일생이 인생의 풍경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땅을 바라고 살던 자작농의 몰락에서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농간, 17, 8년을 길러온 딸을 한두 해 길러온 송아지 값보다 싸게 매도한다. 노동하다 죽은 아버지의 죽음의 대가와 딸의 몸의 매도로 표현되는 농촌의 비참, 농민의 슬픔, 컴컴한 현실 묘사… (……) - <동아일보>, 1933년 11월 2일

관련도서

<홍해성 연극론전집> 서연호 외, 영남대출판부, 1998< 유치진 연극론의 사적 전개>, 박영정, 태학사, 1997< 유치진 연구>, 이상우, 태학사, 1997< 유치진-한국현대극작가론2>, 한국극예술학회, 태학사, 1995< 동랑유치진전집>, 유치진, 서울예대출판부, 1993< 유치진희곡전집>, 유치진, 성문각, 1971<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의 활동 연구>, 모성수,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1998< 1930년대 극예술학회에 대한 연구>, 김성희, 이화여대 석사학위, 1983

연계정보
  • 토막
  • 촌선생
  • 이광래(李光來)
  • 유치진(柳致眞)
  • 윤백남(尹白南)
  • 이헌구(李軒求)
  • 신앙과 고향
  • 바다로 가는 기사들(Riders to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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